2013년 11월, 소더비 뉴욕에서는 인쇄기로 찍어낸 성경, 시편의 모음집이 등장했다. 최종 낙찰가는 1,416만 5,000달러(한화 약 150억 원). 인쇄 서적 경매 역사상 최고가였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이 놀라운 가격은 단순히 희소성 때문이었을까.
베이 시편집 초판본은 약 1,700부가 인쇄됐다. 그중 약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남아 있는 책은 단 11권이다.
대부분은 공공기관이나 도서관 개인 소장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 책이 경매에 나올 일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이 11권의 책 중 2권은 보스턴에 위치한 올드 사우스 교회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다양한 비영리단체를 후원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두 권 중 한 권을 소더비 경매에 내놓았고, 역사적인 경매의 기록이 세워진 것이었다. 이 책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이렇게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우리는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 미국의 대서양 반대편에 위치한 영국에서부터 이 답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조세프 글로버는 1624년 런던 남부에 위치한 한 마을에 목사로 부임했다. 가문의 성공 덕택에 성직자로서의 삶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청교도 목사였던 것이다. 새로 왕에 즉위한 찰스 1세는 청교도를 포함한 다른 분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왕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윌리엄 로드를 임명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흘러갔다.
개신교도들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들의 코와 귀를 베고 얼굴에 낙인을 찍기도 했다. 로드의 괴롭힘으로 인해 청교도 목사였던 글로버도 1636년 목회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새로운 희망이 된 것은 신대륙이었다. 1630년대 이미 수만 명에 달하는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의 뉴잉글랜드로 향했고, 그들은 매사추세츠 주를 중심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었다. 마침 글로버의 흥미를 끄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바다 건너 뉴잉글랜드에는 아직 인쇄기가 없어서 성경은 커녕 복음을 전할 소책자조차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 이후 당시 영국은 이미 곳곳에 인쇄소가 흔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할 대서양 건너편에 인쇄기란 사치품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곳으로 건너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손에 쥐기는 팍팍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글로버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처럼 들렸다. '신대륙에서 [성경]을 찍어 성도들과 복음을 나누고 선주민들을 전도하자’. 미래가 불투명했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지체 없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했다. 투자자들을 모았고 인쇄 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매했다. 1638년 맑은 여름, 준비를 마친 글로버 목사와 가족들은 지체 없이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글로버는 아메리카 대륙을 밟을 수 없었다. 그는 대서양 한가운데를 지나던 도중 천연두로 여겨지는 심각한 열병에 걸렸고, 결국 목숨을 잃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신의 소명도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 인근에 위치한 케임브리지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할 땅과 자택을 이미 구매한 상태였다. 인쇄기를 운영해서 출판과 판매를 담당할 주식회사까지도 설립해 놓았고, 잉글랜드에도 이름난 인쇄 기술자였던 스테판 데이를 섭외해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동승한 상태였다. 그의 가족들이 함께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집과 비용을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글로버의 소명을 이어받아 이 모든 사업을 총괄할 후계자도 있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였다.
배는 무사히 보스턴항에 도착했다. 글로버 부인은 서둘러 케임 브리지에 스테판의 가족들이 머물 집을 구했다. 그곳은 또한 인쇄기가 설치될 곳이기도 했다. 스테판도 자신이 맺은 계약에 충실했다. 아메리카 식민지 최초의 인쇄기가 드디어 임무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매사추세츠에 먼저 정착했던 청교도들은 이 소식을 누구보다도 반겼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스테판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먼저 찍어낼 인쇄물을 무엇으로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성경일 법도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시편이었다. 그 이유는 식민지에 정착한 사람들의 형편이 고려되었다.
성경은 두껍고 따라서 비쌀 수밖에 없기 때문에 먹고 살기 빠듯한 그들이 선뜻 구매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예배 형식도 고려되었다. 예배 중에 시편 구절을 노래에 맞춰 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것이 신도들의 신앙을 확인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렇게 접근성과 실용성을 고려하여 시편의 인쇄가 결정되었고, 매사추세츠에서 가장 학식이 높다는 성직자 30명이 모여 히브리어로 된 시편을 쉬운 영어로 번역했다. 거의 1년에 걸쳐서 말이다.
1640년, 드디어 인쇄기는 역사적인 첫 인쇄물을 발행했다. 기나긴 여정 끝에 엘리자베스 글로버가 남편 조세프 글로버 목사의 신실한 종교적 소명을 이어받아 인쇄에 성공한 바로 베이 시편집이다. 그리고 이 식민지 최초의 인쇄소가 설치되었던 케임브리지 인쇄소는 훗날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져서 현재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의 기원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적 소명이 미국 지성의 산실로 거듭난 셈이다.
사실 미국이 청교도들의 종교적 자유와 신념으로 건국되었다는 주장은 그저 미국 건국의 신화쯤으로 여겨지며 쉽게 비판을 받곤 한다. 역사가 짧은 미국이 자신의 역사를 좋은 점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의 건국이라는 스토리에는 글로버 목사 부부 같은 청교도적 신앙 힘과 희생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을 건국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신화라고 비판할지라도, 미국인들은 여전히 이 신화를 믿고 의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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